영화가 시작되면 침대에서 한 남자가 눈을 뜹니다. 하지만 이건 좀 부족한 표현이네요. 오히려 “청량한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하얀 호텔식 침구 위에서 한 남자가 살며시 눈을 떴다”는 게 더 구체적인 묘사일 겁니다.

형편없는 외모의 남자는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황급히 여자의 집을 빠져 나갑니다. 이런 황당한 영화의 시작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전혀 불평하지 않죠. 이 영화는 매일매일 얼굴이 변하는 한 남자에 대한 영화니까요.

하지만 이 신박한 도입은 영화를 직업적으로 보는 저에겐 무척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인트로(intro) 내내 단 한 번도 주연배우가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점. 심지어 시작 후 20여 분이 지난 뒤에야 영화의 유일한 주연 배우 한효주가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죠.

실제 원작의 도입이 그러했더라도 정통파 충무로 출신의 감독이라면 충분히 각색되었을 겁니다. 뻔한 각색이라면 한효주가 먼저 등장해 관객의 뇌리에 앞으로 전개될 내러티브의 안전망을 깔아놓고 이후 유명한 순서대로 우진 역의 배우들이 극을 이끌어 가는. 아마도 이런 식이면 이 영화는 그저그런 영화로 남았을 테죠.

백종열 감독은 과감하게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립니다. 오히려 만듦새만 놓고 본다면 영화는 원작보다 더 매끄럽고 깔끔하게 그려집니다. 100명이 넘는 엑스트라와 스무 명이 넘는 조연 배우들이 만들어낸 ‘우진’은 실제 한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2인 1역이나 3인 1역이라면 배우들의 연기에 기대겠지만 ‘123인 1역’이라면 감독의 연출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죠.

하지만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개봉 후 꽤나 공격적인 영화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원작이었던 광고 캠페인 “뷰티 인사이드”의 탁월한 메시지가 언제나 비교 대상이었죠.

도시바(Toshiba) 노트북 속에 감춰진 인텔(Intel) CPU의 탁월함을 겉모습이 매일 바뀌는 ‘알렉스’로 풀어낸 인터넷 캠페인 광고는 정말 탁월했죠. 나이, 성별, 인종의 경계를 넘어선 러브스토리가 광고라니, 말 다했죠.

Intel과 toshiba의 합작 광고 캠페인 “The Beauty Inside”(2012)

하지만 클릭 몇 번에 찾아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광고와 극장 상영을 목적으로 제작된 상업 영화를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건 좀 그렇죠. 소중한 시간과 돈을 지불한 관객들은 언제나 적당한 보상을 요구하니까요. 특히 로맨스 영화라면 더욱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허술하지도 않은 볼만한 영화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히 20년 동안 최정상 CF 감독이었던 백종열 감독의 공간 연출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이야기 구성은 단순했고 내러티브 역시 로맨스 영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원작과는 별개의 이미지를 심어둡니다. 바로 ‘남성’으로서의 우진과 ‘여성’으로서의 우진이 모두 등장한 것이죠.

원작 “뷰티 인사이드”에서 여주인공 레아는 모두 5명의 알렉스를 만나 교감합니다. 그 중 레아를 집으로 초대하는 젊은 여자만 빼면 ‘알렉스’는 모두 남자였죠. 그리고 만약 젊은 여자가 아니었다면 레아가 순순히 따라갔을까요? 결국 누가 뭐래도 ‘알렉스’의 본질은 남성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친구 상백과 마주친 아줌마 우진, 이수를 집으로 초대해 비밀을 고백하는 우진(천우희), 다시 찾아온 이수와 교감하는 우진(우에노 주리), 이수에게 엄마를 소개시켜 주는 우진, 이수와 엄마의 고통을 깨닫는 우진(고아성). 이렇게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변곡점마다 여성의 모습으로 우진을 표현합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로맨스의 지점마다 미남 배우가 등장하여 불편했다지만 오히려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뷰티 인사이드>의 우진은 거의 무성에 가깝습니다. 여성도 그렇다고 남성도 아닌… (갑자기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올란도>가 떠오르네요.)

“계모임 가야지 왜 여깄냐?”는 상백의 놀림에서, 엄마와 이수를 소개시켜주는 말투에서, 침대 위에 마주 누워 나눈 대화 속에서, 엄마와 이수의 고통에 공감해 흘린 눈물에서, 우진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진의 본질이죠.

특히 원작은 <미녀와 야수>처럼 레아가 알렉스의 본질을 이해하자 더 이상 모습이 바뀌지 않았다는 동화같은 결말로 끝내지만 <뷰티 인사이드>의 우진은 이수와의 재회 후에도 계속 변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게 더 인간적인 결말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