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엔드 게임> 이후 마블 스튜디오는 계속 죽을 쑤고 있다. 혹자들은 실패라고 말하지만 디즈니의 무시무시한 자본력을 볼 때 일련의 작업들은 도전이고 실험에 가깝다. 그러니 죽을 쑤고 있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 거다. 다만 이 투자가 언제까지 가능할지, 혹은 성공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왜냐고? 영상 매체가, 아니, 세상이 변했으니까.

오늘은 그 변화에 대한 얘기다. 그리고 영화계가 주장하는 ‘골든타임’에 대한 얘기다.

영화 산업의 위기는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46년, 텔레비전이 가정마다 팔리면서 영화 산업은 처음으로 죽을 쒔다. 마침 2차 세계 대전이 끝났고 평화도 찾아왔다. 미국은 전쟁의 피해를 전혀 보지 않았다. 더불어 돈도 넉넉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텔레비전과 자동차를 샀다. 매일 저녁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TV를 봤고 당연히 연속극과 TV 영화가 발달했다. 미국 최초의 TV 영화가 이때 나왔다.

주말이면 젊은 남녀들은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즐겼다. 당시 인싸들은 교외의 한적한 들판에 모여 파티를 즐겼다. 제임스 딘이 청춘들의 신화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리고 중산층 가족들은 주말이면 차를 타고 여행을 가거나 캠핑을 떠났다. 주말 극장에는 돈도 없고 애인도 없는 속칭 머저리들이 남아 영화를 봤다. 1950년대 극장은 루저들과 노인들의 안식처였다.

물론 할리우드가 앉아서 당하진 않았다. 고민 끝에 그들은 당시 영화에 3가지 변화를 줬다. 첫째, 화면 크기를 바꿨다. 일명 시네마스코프. 현재는 16:9의 종횡비가 모든 화면의 표준이지만 처음 극장 스크린, 텔레비전의 종횡비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4:3 이었다. 때문에 영화사들은 극장 스크린의 옆을 늘려서 TV로 영화를 보면 화면이 쪼그라들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방송국도 영화의 양옆을 잘라버리고 송출하는 기이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둘째는 영화에 색을 입혔다. 컬러영화는 제작비가 많이 들었지만 동시에 흑백TV와는 확실히 구별됐다. 당시 컬러TV는 중산층이 사기에 너무 비쌌다. 많은 이들이 흑백TV를 구입했고 방송국들도 보조를 맞춰 흑백을 기준으로 방영했다. 컬러TV의 보급은 1960년대 후반에나 시작됐다. 순식간에 흑백영화는 올드해졌고 한번 컬러영화를 맛본 이들은 다시 흑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셋째, 제작비를 퍼부었다. 연속극과 TV 영화가 유치해 보일만큼 엄청나고 빡세게. 방송국이 쫓아가기엔 무리였다. 스크린 영화와 TV 영화의 퀄리티가 어마하게 벌어졌다. 1959년 <벤허>를 극장에서 본 사람들은 그 이후 텔레비전으로 뉴스나 연속극만 봤다. 역시 영화는 널찍한 스크린으로 봐야 제맛이지. 암. 전략은 통했다.

시간이 흘러 디즈니가 이 변화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2000년 <엑스맨>을 선보이며 시장을 간보던 마블 엔터테인먼트는 2008년 <아이언맨>으로 대박을 쳤다. 그 후 디즈니가 40억 달러를 던져 마블 엔터를 삼켰다. 마블의 풍부한 IP와 디즈니의 자본력이 만나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 몬스터는 영화산업의 돈을 속되게 쭉쭉 빨아들였다. 언제까지? 코로나 팬데믹 직전까지.

코로나 이후 일부 시네필들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침몰한다며 춤을 춘다. 영화를 콘텐츠로 전락시키고 극장을 놀이동산으로 만들어버린 디즈니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탓이다. 영화 생태계가 변한 걸 생각하면 이해도 된다. 코로나 여파로 급성장한 영화 유튜버들이 마블을 사골마냥 빨아댔고 시청자들은 제작발표부터 개봉까지 마블 캐릭터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쫓아다녔다. 이 현상을 쳐다보는 다른 제작사들도 ‘마블 따라하기’에 급급했다. 스토리는 경박단소해졌고 영화와 영화의 연결고리는 복잡해졌다. 복잡다단한 연속극들이 극장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 연속극들은 대부분 CG로 만들어졌다. 한번만 삐끗해도 어지간한 제작사 정도는 그냥 날아갈 정도로 제작비가 늘어났다.

코로나가 끝난 뒤 디즈니는 심하게 비틀댔다. 포스트 어벤져스를 외치며 내놓은 <이터널스>가 그 시작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터널스>가 망했다고 믿겠지만 NO. 2억 달러를 제작비로 쓰고 월드 박스오피스 기반 4억 달러를 벌었으니 수익은 났다. 하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27억 달러를 벌었단 걸 감안하면 적색경보가 켜진 것 맞다. 클로에 자오 감독의 공개적인 구애에도 케빈 파이기 마블 사장이 후속작은 계획에 없다고 선을 그었다. 문제가 뭔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쳐맞고 있다고 웃을 일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누가 그들을 패고 있는가?’니까.

일부 평론가들의 주장처럼 마블이 겪고 있는 현재의 부진은 그동안 쌓였던 CG 영화의 피로감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내일부터 감성뿜뿜한 영화를 애호하러 사람들은 다시 극장에 올까? 적어도 대한민국은 아니다. 이미 그 결과가 <범죄도시>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여전히 대중은 ‘빌런’과 ‘영웅’이 싸우길 원했다. 단지 CG가 아닌 궁극의 리얼리티를 원할 뿐이다. 왜지?

범인은 넷플릭스다. 검정 망토에 붉은 피. 흡사 흡혈귀를 연상시키는 이 로고의 주인공. 그렇다. 이들이 지금 한국 영화계의 피를 쭉쭉 빨고 있다. 더불어 유튜버들도 이젠 마블을 버리고 넷플릭스를 힘차게 빨고 있다. 덕분에 2024년, 드라마‧영화를 제작하는 상장사 11곳 중 6곳이 적자다. 나머지 5곳 중 3곳도 수익이 10억 원 미만이다. ‘스튜디오드레곤’(364억 원)과 ‘쇼박스’(245억 원)만이 돈을 벌었다. 스튜디오드레곤은 미디어 공룡 CJ의 계열사니까 결국 제대로 돈 번 제작사는 <파묘>로 대박을 낸 쇼박스가 유일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코로나가 창궐하자 OTT는 ‘집합금지’의 단비를 먹고 쑥쑥 컸다. 2025년 6월 기준 넷플릭스의 활성 이용자가 수는 1400만 명 이상. 국내 방송사 시청률의 수집 대상을 특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넷플릭스에선 망작만 아니면 1400만 명 이상이 그냥 보는 셈이다. 또한 이건 국내 이용자 숫자일 뿐 한류 영향을 받는 아시아로 확대하면 수억 명의 시청자가 스탠바이 상태다. 그러니 국내 방송사, 영화사는 넷플릭스와 머니 게임 자체가 성립불가다. 더불어 넷플릭스는 광고형 요금제, 네이버 멤버십과의 결합을 내세워 광고시장까지 삼키려 한다.

더구나 그동안 국내 방송사는 제작사에 킹 오브 갑질 중이었다. 방송사는 자체 제작 드라마도 제작비를 100%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외주 제작은 많아야 30% 정도 수준. 제작사는 제작비를 맞추려 PPL을 쫓아다녔다. 결국 무일푼 백수 주인공의 집 안에 최고급 안마의자를 들이밀어 시청자들의 욕도 먹었다. 이런 척박한 한국 드라마 제작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넷플릭스는 제작사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했다. (공식화된 건 아니지만) 전체 제작비에 더해 20%를 이윤으로 보장하는 방식은 누가봐도 혜자로웠다.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 나아졌고 톱배우들의 몸값도 치솟으며 드라마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올랐다. 너도나도 넷플릭스에 줄을 대기 위해 애썼다.

심지어 넷플릭스는 공식적으로 방송사도 아니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눈치 따윈 보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방심위는 삭제나 접속차단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동안 방심위의 등쌀에 흡연장면도 못 넣던 제작사들은 하나같이 수위 높은 드라마를 찍기 시작했다. 출연료를 두둑이 받은 배우들은 연신 담배를 피워댔고 피와 살이 도배된 넷플릭스 시리즈가 쏟아져 나왔다. 청정 구역에서 유유히 살았던 시청자들의 말초신경이 빠른 속도로 자극을 빨아들였다. 아니 김장철 배추처럼 푹푹 절여졌다. 물론 고춧가루 대신 시뻘건 피에 말이다.

다시 물어보자. 지금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며 사회상을 오롯이 담아낸 영화가 개봉되면 사람들은 극장을 찾을까? 앞서 말했듯 국내 영화투자사 중 유일하게 수익을 낸 곳은 쇼박스 뿐이다. 넷플릭스로 말미암아 배우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저 따뜻한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아마도 뜻있는 젊은 감독의 저예산 영화겠지? 넷플릭스의 파도 속에 허우적대는 사람들 중 얼마가 영화관을 찾을까? 참고로 곧 멀티플렉스 사업자 1곳이 사라질 예정이다.

낭만적 회로를 돌리면 메가박스가 사라진 자리에 (설마 롯데가 사라질까) 소규모 극장들이 들어차고 아기자기한 영화들이 걸리면서 관객들이 오지 않을까 꿈꿔 본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이건 개꿈이다. 2020년 이후 OTT를 비롯한 구독형 문화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추세다. 반대로 극장, 공연 등에 대한 소비는 계속 줄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AI도 이 문제에 한몫을 한다. 유료 ChatGPT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쓰는 나라가 한국이다. 우리 민족은 경쟁에 뒤처지면 죽는 줄 안다. 따라서 유료 AI 구독자는 더 늘어날 거고 2개 이상 구독하는 유저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 대다수가 2040이며 이는 한국 영화계가 기대하는 관객층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이들은 매일 늘어나는 지출 구멍 중 무엇을 틀어막을까?

시네필들이 좋아하는 저예산‧다양성 영화들은 대부분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다. 아니다. 수지타산은 제쳐두고 극장 스코어 1만 명을 넘기면 성공이다. 상업영화 기준 극장 스코어 300만 명이면 수익은 100억 원으로 추산한다. 1만 명 관객으론 제작은 둘째치고 홍보, 배급 비용도 안 되는 상황이다. 과연 이런 영화에 누가 투자할까? 답은 ‘영진위’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한 해 수십편의 저예산 영화에 제작비를 투자한다. 그리고 이 비용은 우리가 구입하는 티켓값에 영화발전기금(업계에선 ‘영발기금’이라 부름)으로 포함된다. 결국 한국 영화시장의 절대 파이를 차지한 상업영화가 저예산 영화들의 리얼 투자자인 셈이다.

COVID-19 사태 이후 한국 극장가는 그야말로 고사 직전이다. 고작 3개 밖에 안 되는 국내 멀티플렉스 중 1곳은 적자를 못 견뎌 이미 GG를 외쳤다. 이들이 운영을 잘못해서 이 사단이 났을까? 글쎄다. 국내 멀티플렉스의 잘못이야 이것저것 많지만 지금은 아니다. 극장에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극장이 죽어날 거고 영진위 곳간도 텅 비게 된다. 영화 단체들은 국고를 기대하겠지만, 글쎄? 한국영화사를 돌이켜 볼 때 문화산업은 언제나 뒷단이었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미 경쟁력을 갖춘 음악, 게임이 있다. 영화는 울고 떼쓰면 사탕이나 물려줄 고명딸 정도가 될 거다. K-무비가 큼직한 상복은 많았어도 국제적으로 큰 이문을 남긴 경우가 거의 없다. <오징어게임>도 돈은 넷플릭스가 챙겼음을 명심하자. 결국 K-무비를 살리려면 배급이, 그것도 강력한 국내 배급사가 절실하다.

웃프게도 한국영화를 걱정하는 이들과 직접 영화를 생산, 유통하는 이들 사이에는 묘한 거리가 있다. 때문에 한국 영화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영화 산업과 동떨어져 이야기된다. 더욱이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스크린쿼터제’의 기억도 있다. 뭉쳐야 살고, 버티면 이긴다. 하지만 COVID-19 이후 달라진 것은 영화 산업의 지형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매체다. 1950년대 텔레비전이 안방에 들어찼듯 지금 모두의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졌다. 한국의 2040은 더 이상 TV를 쓰지 않는다. 1960년대 할리우드가 새로운 영화를 찾아냈듯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이유로 극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세상에 영화는 남고 극장은 특정 소수의 교양으로 전락하겠지. 2000년 이후 영화 잡지가 그러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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